형은 제가 군인시절에 집돈을 많이 갖다 썻다고 나무랍니다. 어쩜 엄마돈이 제게로 쏠리면서 형 자신에게 악영향이 오는게 아닐가 하는 두려움에서 였을 겁니다.
첫 휴가를 와서, 어머니께 그 동안 제가 매일같이 갖다 쓸 돈이 이만한데, 삼분의 일만 일시불로 주신다면 더 추가청구는 않겠다고 다짐을 드리고 받은 돈으로 연인이 기다리는 산골가는 비행기표를 끊었답니다. 우리식구는 물론이고, 저를 아는 사람들은 난리들이 였답니다. 제가 불쑥 애인을 만나러 가는데 비행기를 탄다니, 그 시절이 사십년전이니 어이가 없어 하는 일은 당연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사랑이 였으면 그리 하냐고 비난이 이해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알면서도 그리 했답니다. 저 같은 상고출신이, 풍족한 집도 아닌데 어떻게 그리 거금을 쓰려고 생각했겠읍니까?
비행기값의 사분의 일이면 뻐스를 타고도 갈 수 있는 길인데...
허지만 뻐스를 타면 하루내내 가는 길을, 비행기는 이륙만하면 금새 착륙방송이 나올 만큼 빠르고, 또 가는 동안 적어도 두번은 식당엘 가야하는데 비행기에선 간식을 다 챙겨 먹기도 전에 도착하니 그리 장부상에 차가 나질 않더랍니다. 그리고 빨리도 보고 싶었으니...
집 사람 만나러 가는 길은 군사지역을 가로 질러 가야 하는데, 많은 검문검색이 있는 곳이니 군복을 입거나, 사복을 한 짧은 머리에게는 불편한 여행길이 될듯 싶어 결정을 그리했었답니다. 비행기를 타려고 승선열에 서니 보안대 요원이 지레 신분확인을 하고 먼저 탑승을 시키더군요. 본의 아니게 대접을 받는 처지가 되는 여행이 였답니다. 아무튼 지금도 그리 돈을 많이 썼다는 생각은 않고 있습니다.
군인으로서 자신의 근무지역을 벗어 난다는 것이 마치 적진에 침투하는 기분이 들던 시절입니다. 집사람의 집이 하필이면 군사지역의 중심에 있는가하는 불운을 한탄하기보다는 어떡허든 보고 와야한다는 임무를 수행해야겠다는 불타는 듯한 쫄병의 사명감은 늘 외출이나 외박때가 되면 생겼답니다. 물론 하늘이 보우하사 저는 그 수(?) 많은 임무를 잘마치고 제대를 했답니다. 간혹 불운한 전우들이 귀대가 늦어지고, 미귀로 붙들려 영창을 가거나, 공수나 유격훈련으로 희생되어 갈 때면, 우리 또한 연대기압으로 그들의 운을 함께 원망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하느님의 돌봄으로 혁혁한 적진침투용사로 이름이 등재되니 인사계는 외출이나 외박때가 되면 신참내기들을 부탁하곤 했습니다.
고속뻐스를 이용한 적지침투는 저 혼자만이 작전을 합니다. 얼굴 표정이 변해서는 안 되니 말입니다. 전군의 비상시에도 혼자서 활동해야 했답니다. 여럿이 뛰여 도망친다는 것은 서로의 위험요소가 크고, 아무튼 잡히면 어떠한 처벌이 닦아 올지 궁금 했지만, 우선은 되게 얻어 터져야 할테니...,
그 시절에는 이런 무용담을 집 사람에게는 한번도 못 했답니다. 그리면 얼마나 걱정했겠습니까?
이런 침투작전으로 집엘 갔었다면 왜 자꾸 오는냐고 야단을 맞았을 테고,
제 집 사람이 그 때 그리 있어서 제가 용감한 군인이 될수도 있었나 싶습니다.
훈장말입니까? 이맘만해도 족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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