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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생활속 산 예배를 더욱 중시하시는 하나님

 

 

◈생활 속 산 예배를 더욱 중시하시는 하나님.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전한 율법으로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려 하지 않고, 제사장이란 중개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만났습니다. 그래서 따로 성막(성전)이라는 장소를 마련해 제사장들을 상주시켜 두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아 뵙고자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하여 그들의 소원이나 딱한 사정을 듣고 하나님께 나아와 대신 아뢰게 하였고, 또 찾아 온 사람들의 기도를 직접 듣고 그 응답을 제사장에게 들려 주어 대신 일러 주게 하였습니다. 이런 일의 선구자 노릇을 모세와 아론이 하였고, 그 후의 모든 제사장들이 본받아 실행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같은 분들에게는 하나님이 친히 대면하여 자신의 뜻을 나타내었으나, 모세로부터 율법을 전해 들은 이스라엘 민족 대부분이 그들 조상들과 같은 믿음이 없었기 때문에 이들은 하나님이 주로 제사장들을 통해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들 제사장들을 통해 하나님이 백성들을 대하다 보니, 때로는 제사장들이 백성들 위에 군림하여 사리사욕을 취하는 일들이 빈번하게 발생되었고,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다른 영의 뜻으로 왕과 백성들의 머리(지도자) 노릇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제사장들도 죄인이라 하나님께로 나온 말씀의 뜻을 사심없이 전하지 못하였고, 또 제사장께 물으려 온 백성들도 죄악의 뜻을 품고 나아와 탐욕을 구하기 때문에 제사장들이 그들의 비위에 맞는 말을 하여 백성들에게 아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점점 더 제사장들로부터는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해 들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왕들과 제사장(선지자)들과 백성들이 하나 같이 부패타락하여 천하 만민에게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전할 수 있는 선생 노릇을 할 수 없게 되자, 하나님이 자신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어 영원히 제사장 직임을 전담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천하 만민들이 직접 자기에게 나아올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즉 이전처럼 제사장이란 특이한 중개인을 통하지 않고 직접 예수님 이름으로 자신을 찾아 뵈올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껏 따로 성막(성전)이라는 구별된 장소에서 제사장이란 구별된 인물을 통해야만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었던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수님이 오셔서,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한복음 4:23~24)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죄한 자기의 피로 세상만민을 구속(救贖)하기 위해 오신 이후부터는 사람들이 직접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을 찾아 뵐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 이름으로 하나님을 뵈올 수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사람들의 죗값을 대신해 참혹한 형벌(죽음)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후부터는 하나님 앞에 죄가 없는 새사람이 된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이것을 믿는 믿음을 사람들의 유일한 의로 규정하셨기 때문에 이 믿음을 지닌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갖는 위상은, 별다른 희생 제물을 마련해 중개인(제사장)을 통해야만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못난 죄인이 아니라, 아버지를 버리고 멀리 떠나간 아들이 회개하고 방금 돌아온 것과 같은 신분입니다. 예수님이 저들이 아버지를 몰라 뵙고 떠나간 죄악을 대신해 참혹한 형벌을 치른 것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군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군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누가복음 10:22) 하심 같이, 성령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과 같은 마음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이루어 드리자, 이에 대해 하나님이 기뻐하여 그가 소원하는 그 무엇이든 다 허락해 주시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말씀을 다 순종하고 난 후 빈 소원이 무엇이겠습니까? 오직 자기를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도 자신의 심령과 같은 성령을 선물로 받게 하여 그 성령의 지도하에 그도 자신과 같은 언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아들들이 되게 하는 것이 유일한 소원일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급에 속한 진실한 사람들이 자녀나 제자나 국민들에게 가장 물려주고 싶은 재산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오직 예수님과 같이 자신의 가장 귀중한 재산인 성품, 곧 윗분에 대한 존경심과 믿음과 사랑(열정)을 물려주려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 같이 거룩하고 지혜로운 부모님(선생님, 지도자)들은 자신의 자녀나 제자나 백성들에게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성품, 곧 부모급 사람들에 대한 존경심과 믿음과 열정(사랑)을 물려주려 하지만, 사단(조폭) 같이 거짓되고 악하고 게으르고 음란한 반역자(부모, 선생, 지도자)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소유물에 불과한 지위나 재물이나 권세나 명예 같은 것들을 악착 같이 긁어 모아 그것을 아랫 것들에게 던져 주면서 으스대고 뽑냅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을 닮은 만민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최고최대의 선물과 또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어 드리고 난 후 하나님께 구한 소원들은 모두 자신들의 생명과도 같은 거룩한 성품(말씀)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인간들은 부모급에 속한 분들의 그러한 말씀들을 한낱 시대에 뒤떨어진 잔소리로 취급해 무시하고 오직 부모님(하나님)의 소유물(재산)만 탐하여 가지려 합니다. 하나님이 처음 만든 사람들과 처음 택한 선민들에게 에덴동산의 낙원과 또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복지를 선물로 주었으나 그것을 선용할 수 있는 주인 정신, 곧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이 없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을 도적인 마귀와 함께 죄악을 즐기는 일에 탕진하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일들을 겸험한 하나님이 이제는 자기 자녀들에게 자신의 소유물보다 그런 소유물을 생산하고 선용하고 관리할 수 있는 주인 정신, 곧 자신의 거룩한 성품을 먼저 주시고자 하였습니다. 그러기 앞서 선결되어야 할 문제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하나 뿐인 독생자의 피로 저들의 죗값부터 치르어야 했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그러한 뜻을 좇아 하나 뿐인 자기의 목숨을 희생시켜 사람들의 악한 친구인 흉악한 죄악(사단)으로부터 저들을 최우선적으로 구출해 내어 모든 것을 선용할 수 있는 주인 정신인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부터 가르쳤습니다. 다시 말해 의의 자녀로서 지켜야 할 분수와 도리가 어떠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 저들 모두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의를 행하여 의의 면류관을 쓰는 사람들이 되게 하였습니다.

 사람이 의(하나님)의 자녀로서 지켜야 할 분수와 도리가 어떠하다는 것을 깨달아 지키는 것보다 더 큰 생명의 이익(보물)이 없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본분을 다 완수하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님이 세상에 두고 온 제자(성도)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바로 자신과 같은 심장(성품, 예법)을 갖고 하나님을 찾아 뵙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항상 하나님의 실체이신 말씀(신령)을 자신의 깨끗한 마음인 진정으로 순종해 지키어 하나님께 예배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하나님을 자유롭게 찾아 뵐 수 있는 이러한 예배를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께 드리게 하여 저들도 항상 하나님을 자유롭게 찾아 뵙도록 하는 것이 예수님의 유일한 소원이고 목적이었습니다.

 사람이 죗값을 치르어 죄악에서 벗어나지 않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권세만 달랑 갖게 되면, 죄가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과 공생하며 예수님의 권세를 오염시켜 악화시키기 때문에 예수님이 자신의 무죄한 피로 자신을 믿는 자들의 죗값부터 치르었습니다. 죄를 머금은 상태에서 행하는 의는 죄(마귀)를 위한 의가 될 뿐, 하나님을 위한 의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행하여 상받으려면, 가장 먼저 죄인의 죗값을 치르어 무죄한 의인이 되게 하는 것이 가장 급선무입니다. 예수님이 참혹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죽은 죽음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즉 사람이 죗값을 치르지 않는 상태하에서는 아무리 예수님의 마음을 갖게 되더라도 죄를 위한 일만 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가르쳐 준 언행으로 자기를 찾아 뵙도록 하였습니다. 그런 예배이어야만 비로소 하나님이 기뻐하여 만나 주십니다. 그렇지 않고 여전히 구약의 예법을 좇아 하나님을 찾아 뵙는 장소가 따로 있거나,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제사장이란 중개인이 따로 있어서 항상 그들을 통해 하나님이 사람들을 만나 주신다면, 반드시 구별된 예배 장소나 구별된 제사장들을 사람들이 또다시 우상처럼 떠받들어 모실 것이 뻔합니다. 다시 말해 신령과 진정이 결여된 인간들끼리의 만남과 교제 장소로만 끝날 뿐, 거룩한 하나님을 만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대하여야 함은, 하나님 자신이(본체가) 육신이 아니라 말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요한복음 4:24) 하심 같이, 인간의 육감(肉感)이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형체는,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과 글 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요한복음 6:63) 하신 말씀으로 영에 대해 설명하였고 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한복음 1:1) 하신 말씀으로 성경에 기록된 말씀(글) 자체가 하나님의 근본 실체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참된 하나님을 찾아 예배할려면, 육적인 건물(성전)이나 혈육의 사람(제사장)들을 거치지 않고, 하나님이 일러 준 말씀을 그대로 따라 행하는 것이 바로 참된 하나님을 만나 뵙는 예배입니다.

 그렇다고 오늘날의 교회 건물이나 그곳에서 성경을 가르치는 분들을 전적으로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시고 교회의 몸통은 성도들이기 때문에 교회의 건물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는 가장 좋은 장소(학교)이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분들이 목사님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서 하나님께 산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방법을 배워 실생활 속에서 늘 하나님께 예배드려야 합니다. 교회의 건물과 교역자들은 더 이상 성전이나 제사장 행세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나 사도 바울은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서 오직 자신들과 같이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 뵙고 살아가는 방법(길)을 전하고 가르쳤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한복음 8:29) 하심 같이, 예수님은 생활 속에서 항상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아 뵙고 예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잠시라도 혼자 두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해 자기 심령 안에 모시고 있는 것보다 더 참된 살아있는 예배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의 목사님들이 성도들에게 이와 같은 산 예배자가 되게 하여 교회 바깥에 나가 세상을 이기는 거룩한 성도가 되게 하지 않고 여전히 이스라엘 말기에 등장하는 제사장 노릇 하기에 급급합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그들이 진행하는 예배가 끝나기가 무섭게 죄악 세상으로 돌아와 여느 불신자들과 똑 같은 생각과 마음으로 행동합니다. 이런 자들의 심령 속에 하나님이 좌정해 계실 수 있겠습니까?

 목사님들의 한낱 눈요깃감을 위한 헛된 예배에 갈증을 느낀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또다시 사마리아 여인처럼, 오늘도 어느 교회, 어느 성전, 어느 기도원, 어느 은사 집회장에 나가 신령한 제사장을 만나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드려 은혜 받을까 하며 찾아 헤맵니다. 신령한 장소에서 신령한 목사님을 만나 찬송하고 헌금하고 기도하고 말씀 듣는 것만 예배로 취급할 뿐, 생활 속에서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정직하게 성실하게 공의롭게 거룩하게 일(예배)하지 않습니다. 즉 부모님과 상전들을 공경하고, 또 이웃들과 고객들과 국민들을 정직하게 대하여 장사를 하고 사업을 하고 정치를 하는 것이 더욱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찾아 뵙는 산 예배라는 것을 모릅니다.

 사람들을 신령(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는 것이 곧 하나님께 신령으로 나아가는 일이며, 사람들을 정직하게 대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대하는 일입니다. 그런데도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안과 목사님들 앞에서만 콧김 같은 신령과 진정으로 대할 뿐,  생활 속 사람들에게는 온갖 음모와 거짓과 위선과 모략술수와 음란방탕으로 대하여 하나님의 진노만 쌓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이해득실이 오가는 생활 속에서 받는 대접만 산 예배로 취급해 받으실 뿐, 이해득실이 전무한 구별된 장소(성전, 교회, 집회)나 구별된 사람(제사장, 목사님)들을 통해 받는 대접, 곧 외식으로 가득찬 죽은 예배 속에서는 결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명심하십시오.

출처 : 행복한 날의 체리 핑크
글쓴이 : pink flower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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