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분의 召天이 지난 일월 십오일字에 있었답니다.
그분의 자제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소식을 없이 했읍니다,
그냥 그리 잊혔지고 있었읍니다.
성당의 교적에는 지금도 살아 있는 쪽에 계실 지도 모름니다.
그분이 제일 미더워 하던 사촌 여동생 김 선자 엘리자벳자매랑
제 집사람이 다니는 성당이니 좋겠다 싶어 '사도 요한'이 되셨다 했읍니다.
그곳에서 저 같은 억새를 만나 더 기분 좋았답니다.
허긴 지금의 제 심술보가 그득만 해갑니다.
떠나셨다는 소식은 한참 후에 들었읍니다.
전화를 해도 귀가 어두워 못 받으시나 보다 했는데,
그때 쯤 이였나봅니다.
누가 연도를 해 드렸을가...?
집안이 하도 핍박 했었답니다,
그래서 '가미가제'항공병을 쉽게 결심할수 있었답니다.
훈련중에 해방이 되여 태평양은 못보고 귀국을 하셨답니다.
배움이 있던 가난의 자식들을 때 맞춰 부추기던 그때 공산운동,
그도 달갑지 않아 국군이 되였답니다.
6.25가 나고 병참장교로
수송열차를 도맡아 지휘하면서 훈장도 타고,
부서진 다리뼈를 은심으로 박은 상이 용사까지도 되셨다는데...
빨치산들의 매복으로 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공산운동하던 때 친구가 대장빨치산이더랍니다.
그래서 악수하면서 헤여지는데 그 친구가 권총이나 달라더랍니다.
그때 일로 사형판결을 받았는데,
정말 죽었으면 하던 願이 이루워 지니 아무도 괴롭히는 사람이 없었다랍니다.
장인이 모든 것을 올인하여 당신을 살렸답니다...
다시 군인생활이 이어지고,
5.16이 나면서,
중령으로 예편되어 혁명정부의 관료가 되니 가난이 없어 지더랍니다.
집안식구나 친척은 물론, 그 마을 전체가 신평들이 펴지더랍니다.
고향을 떠나 서울살림을 하면서
가난때문 어린 날 집 떠났던 맏딸을 어찌어찌해 찾게 되었는데,
돌아 오지 않는 딸이어 헤여지게 되고,
더는 걱정 없으려니 하던 마눌님은 암이여 하며 붙들지도 못했답니다.
미국으로 이민을 왔답니다.
많은 날이 흘렀고, 흘러가고...
그때 막내 딸이랑, 아들들이 다 잘 사니 이제는 됐다고 했읍니다.
애들 힘들게 않고 이곳서 살다 가겠다고,
그런데,
그렇게 미워 하면서도 아들들이 '那城'서 산다고 그리 가셨읍니다.
남들 몬양 저도 모르는 사이였다면 그리 입을 삐죽거렸을 겁니다.
정말 열심히 살았던 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제 날 고사리를 뜯어와 집사람이랑 다듬으며 또 칭송을 했답니다.
내가 그 나이가 되어 그렇게 아픈 몸이여 하면서도 그리 부지런 할 수 있을가?
내 결백이 摩草를 피우시는 것을 속으로 못 마땅해 했었읍니다.
그러니 남들은 오죽이나 재판을 했겠읍니까?
아! 그 아픔을 난 몰랐답니다.
이제야 나이 폼에 드니 그렇겠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누가 그분의 碑木을 세워 놓았을지는 모릅니다.
그리고 뭐라 그분을 새겨 놨을가도 궁금은 합니다.
다만 저 나름대로의 찍힌 이야기 몇을 인화해 올려 놓았읍니다.
주님께서 '힘들어 말고 내게 오라!' 하셨으니 그리 하셨겠죠?
앵커리지 사이버 망향동산 산지기 이까밀로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