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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스카한인傳書

누렁이의 恨

  부처님을 늘 믿던 내 할머님이 제일 사랑하시던 손자로선 애시당초 개고기란 소리를 입밖에 내는 일은 힘들었다.   할머니만큼의 나이가 된 지금에도 어설픈 낱말의 하나가 개고기다.   옛날에 불교신자들 뿐만 아니라  동물애호가들까지 함께 한다면 이 말이 자주 사용되는 것은 참 잘못이다.   그런데 세태를 들먹거리며 중놈들이 먹어되는 것을 보면,  눈감아 주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천주교로 개종을 하고 나니 신부들이 무척이나 좋아들 하는 것을 알았다.   그러니 핑계가 없어 못 먹던 개고기는,  천주신자들에게 있어서는 먹어 없애야 할 사탄쯤으로 생각되어 지고, 여름 날에는 사육제의 최진상품이 된다.   내가 자라 온 정서에 위배되는 현상이라 껄끄러워 하면서도 익숙해지려고 애를 쓰며 그 답을 찾아 본다.   조선시대 말에 들어 온 천주교가,  자리 잡기도 전에 탄압이 시작되면서,  서양 신부들이 우리 선조들 틈새에 자주 나타나며 전교가 시작된다.   풀나물에 익숙치 못한 오랑케 신부님들이 숨어 다닐 때,  우리 순교선조님들은 개고기를 그 분들에게 대접을 했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누렁이를 봉헌하면서 우린 주님을 맞이 했다고 볼 수 있다.   허지만 그러한 과거를 추모하고, 그 험난했던 순교의 얼을 기린다면서,  개고기가 맛있고,  보양은 물론이고 남성들에게 좋다고 호들갑을 떠는 것을 보면 좀 애석한 생각이 든다.   支那국의 역사적 기념잔치에는 가죽을 고와 만든 묵요리가 최고품에 오른다는 소릴 들었다.   만리장정이니 하며 도망치면서 궁여지책으로 만들어 먹던 것이지만,  그들만의 해방전쟁 수행과정에서 생긴 전통으로,  보양식이니 맛이 있고, 없고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 상징성이 큰 음식이란다.   그리해 혁대나 구두등 가죽을 모아 푹 고운 후 묵이 된 것을 나눠 먹던,  그 도망의 시절들을 다시금 새겨 본다고 한다.   우리의 경우도 가난의 시절에,  마을전체가 흥그러웠던  누렁이의 희생을 음미하며 먹는다면 그리 흉이 될 것이 없다고 생각은 하고 있다.   전설속에 배고팠던 시절을 회상하면서 개고기 몇점을 묵상해 보는 것은 과히 나무랄 일이 아닐 것이다.   헌데 요즈음처럼 무지막스럽게 많은 고기를 갖다 놓고,  맛의 유무를 가늠하며,  보양을 넘어서  무슨 힘이 생기게 한다고 열중하는 것을 보면 영 못 마땅하다,  아무튼,  우리 성당의 경우는 염소고기가 누렁이 역활을 한다.   주님께 감사드리는 품새가 시작된다.   본당신부가 중앙에 정좌하고,  텃세신자들이 식사전 기도를 우렁차게 따라하고선,  '하느님의 어린 양!'하며 염소탕에 함몰한다.  물론, 이 앵커리지가 개고기를 쉬이 먹을 수 있는 곳이 였다면 '염소'는 '개'가 대신했을 거다.  

 천적의 관계에서 희생된 약자의 남은 흔적을 보며 가해자인 맹수나 맹조에게 욕과 저주를 퍼 붓는다.   사실은,  약자를 먹어 치운 강한 동물들을 우리 인간들은 나무라면 안 된다.  왜냐면 동물들은 먹을 만치 먹고 배부르면 고만이다.   그리해 남은 추종자들이 나머지를 먹고,  그 나머지를 또 남은 추종자들이 먹으면서 먹이 사슬을 이어 간다.   허나 우리는,  '만나'를 주실 때 하느님 말씀을 어겼던 족속들의 후손만 남아서 그런지,  그들의 습관화한 전통에 따라,  배가 채워져도,  내만이 더 필요다는 구실을 찾아 다른 생명들을 또 잡아 먹는다.  내게 더는 필요치 않을 만큼 풍족하게 먹을 것이 있다고 해도,  추종자들에게 조차 나눠주기를 마다 하면서 광에다 여분의 것 들을 재여 둔다.   하늘의 뜻에 맞게 살려는 질서가 생기면서 남에게 베푸는 시대가 시작되는데,  성경에서 개가 빵 부수러기를 먹을 수 있는 권리가 주님의 시절에 소개된다.   그렇듯 그들의 밥상은 인간의 찌거기가 전부였지만  그러한 대우도 받지 못 했을 우리 가난한 시절의 누렁이들을 생각해 본다.   개고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누렁이에 대한 격찬으로 "개고기는 역시 누렁이가 제일이야!"라고 한다.   그 시절의 누렁이들은 인간의 배설물만이 그들의 먹이로 알았을 것이다,  그리해서 살찐 그들의 희생을 즐겨 먹던 사람들은,  자신들의 배설물이 누렁이에게 누적되어 진 것은 이미 짐작했지만,  말만 뻔지르르 하게 미화시키므로서 서로의 챙피스럼이 없는 듯이 했을 것이다.   지금도 그 간의 치부를 노출하지 말자는 묵계가 유전자 속에 박혀져 내려오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그들에게 정상적인 먹거리를 주지 못하고,  잘못인 것을 알면서도 시침을 떼고 그러한 합당치 않은 먹거라를 멕인 죄스럼에 대한 냉정한 참회를 우리 후손들만이라도 대신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자연선생님이 개들의 필요 요소인,  '린(燐)'이 그 속에 많이 있어 자연스레 그들의 먹이가 되였다고 설명을 해 주셨으니,  탈없는 먹이로 보편적인 상식이 된 그 시절에는 이의나 죄의식을 누렁이에게서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은 그 누렁이들이 잘 먹었으니 그리 했었다고 결백함을 주장도 하시겠지만,  어쨌거나 우리 인간들은 염치도 없게 누렁이들에게 배설물을 못 먹게 하지 않은 태만을 뼈저리게 반성해야 한다.   인간의 후각보다도 600배나 예민한 그들의 성능을 배설물에 익숙케한 강제.  또 다른 이야기로는, 인간의 배설물은 소화되지 않은 70%이상의 영양덩어리로서,  개들의 좋은 먹이감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요즈음처럼 사료값이 비쌀때 그 좋은 것을 왜들 안 주나?   사람들이 먹을 것도 부족하던 시절에 개들에게 그거라도 줄 수 있었다는 것이 요즈음  부칸개들과 비교하면 다행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잡아 먹을 개들도 없을만치 살벌한 그곳에는 개들에게 줄 배설물도 여의치가 않은가 보다.   간혹 생존을 위해 도망다니는 개떼들이 있다지만,  인간의 배를 거쳐 나온 나무껍질이며 풀뿌리의 결과물에 흠익하지 않을 것은 뻔하고,  산 사람들에게  잡혀 먹히지 않아야 하니,  굶어 죽은 자의 부서진 시신을 입에 물고 다닌다고들 한다.   제주도의 돼지들도  인간의 배설물을 먹고 자란 놈이 맛있다고,  지금도 그 땟날의 기분으로 그리 사육하는 곳이 있다는데,  동물보호가들의 간섭으로 이제는 누적된 배설물을 먹는 경우가 없어 졌으니  선진 한국이 된거 같다.   물론 아직도 그 옛날의  향수를 대단한 향기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엄밀히 따져,  제대로 멕이지도 못하고 사람속으로 사라진 누렁이들의 과거를 맛있어 하는 우를 어떻허든 없애야 문명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며, 그 옛날 누렁이들의 恨도 마무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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